화용론 마지막 정리
화용론이란 무엇인가?
화용론(話用論, pragmatics)은 언어의 의미를 “맥락” 속에서 연구하는 학문 분야예요. 쉽게 말해, 똑같은 말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경우를 다루는 linguistics의 한 영역이죠. 우리가 일상 대화에서 자주 경험하듯이, 말의 문자 그대로의 뜻(표면적 의미)과 의도가 담긴 실제 뜻(함축적 의미)은 다를 수 있습니다. 화용론은 바로 그 “의도가 담긴 뜻”을 이해하려면 발화가 이루어지는 맥락(context)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친구에게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말했다고 가정해볼게요. 겉보기에는 상대방의 안녕을 비는 말처럼 들리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의미로 쓰일 수 있어요. 이 말이 이별 상황에서 튀어나왔다면, 사실은 “두 번 다시 얼굴 보지 말자”는 뉘앙스로 비꼬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엄마가 사랑하는 딸을 해외로 유학 보내며 “잘 먹고 잘 살아라.” 했다면, 이건 진심 어린 당부겠죠. 이렇게 같은 문장도 맥락에 따라 친절한 인사말이 될 수도 있고, 차가운 이별의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화용론은 이처럼 문장 그 자체의 의미를 넘어, 말이 쓰이는 맥락과 의도를 함께 살펴보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화용론을 정의해 보면: “언어가 실제 사용되는 상황에서의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언어학에서 전통적으로 의미론(semantics)은 문장이나 단어 자체의 의미(맥락을 배제한 의미)를 다루고, 통사론(syntax)은 문장의 구조를 다룹니다. 그에 비해 화용론은 “이 말이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어떤 의도로 쓰였는가?”를 고려해요. 즉 화자(말하는 사람)와 청자(듣는 사람)의 관계,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와 시간, 대화의 사회적 분위기 등 여러 요소를 모두 맥락으로 보고, 그 맥락 속에서 발화(utterance)의 의미와 기능을 분석합니다.
맥락의 중요성: 언어적, 상황적, 사회적 맥락
맥락(context)이란 한마디로 말이 이루어지는 배경이라고 할 수 있어요. 화용론에서는 맥락을 보통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 언어적 맥락: 말 그대로 언어 내부의 맥락이에요. 특정 발화가 앞뒤에 어떤 말들과 함께 쓰였는지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대화에서 “그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왔다면, 이전 대화에서 이미 언급된 인물이 있겠죠. 그 앞선 대화 내용(전후 문맥)이 바로 언어적 맥락입니다. 이 맥락을 알아야 대명사나 생략된 대상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어요. 또 글을 읽을 때도 한 문장만 떼어 보면 애매하지만, 전체 글 흐름 속에서는 명확해지는 경우가 많죠. 이러한 전후 문맥이 언어적 맥락입니다.
- 상황적 맥락: 발화가 일어나는 물리적•환경적 상황을 말해요. 언제가(시간), 어디서(장소), 어떤 환경에서 말하고 있는지 등이죠. 예컨대 똑같이 “너무 춥다”라는 말을 하더라도, 한겨울 추운 방 안에서 하는 말과 한여름 에어컨 빵빵한 방에서 하는 말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전자는 말 그대로 추워서 한 말일 가능성이 높지만, 후자(더운 여름에 “춥다”)라면 약간의 농담이거나 에어컨 세기를 줄여달라는 우회적 신호일 수 있죠. 이처럼 발화 당시의 기온, 날씨, 주변 환경까지도 의미 해석에 영향을 주며, 이것들이 모두 상황적 맥락입니다.
- 사회적 맥락: 화자와 청자의 사회적 관계나 문화적 배경을 가리킵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지에 따라 같은 표현도 다른 의미나 뉘앙스를 지닙니다. 높임말과 반말의 선택, 격식 있는 표현 vs 캐주얼한 표현 모두 대화 참여자들의 사회적 관계 맥락 덕분이에요. 예를 들어 친한 친구 사이에 “야, 이리 와 봐”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워도, 직장 상사에게 똑같이 말했다간 큰일 나겠죠! 이처럼 상대방의 나이, 지위, 친밀도에 따라 어휘와 어투를 조정하는 것이 사회적 맥락의 작용입니다. 또한 문화적 관습도 중요한데, 한국어 화자들은 상대를 부를 때 이름 대신 “어머니”, “이모” 같은 친족 호칭을 쓰기도 해요(예: 식당 아주머니를 “이모”라고 부르기). 이런 독특한 문화 관습도 사회적 맥락의 일부로, 상대에 대한 정중함이나 친근함을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맥락에 따라 언어 표현의 의미와 사용법이 달라지기 때문에, 화용론에서는 항상 그 맥락 정보를 함께 고려합니다. 맥락을 무시하면 의사소통 오류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예컨대, 누군가 갑자기 “저 그거요.”라고 말한다면, 맥락을 모르는 사람은 ‘뭘 어쨌다는 거지?’ 하고 당황하겠지만, 이미 앞서 “무슨 아이스크림 먹을래?”라는 질문이 있었다는 언어적 맥락을 알면 “저 그(앞에 말한 것) 먹을게요”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는 거죠. 이렇듯 언어적 맥락, 상황적 맥락, 사회적 맥락이 어우러져 비로소 말의 참된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발화행위 이론: 말로 행동하기 (Speech Act Theory)
“말은 행동이다”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화용론의 발화행위 이론(言語 行爲 理論)은 바로 우리가 말을 통해 행위를 수행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J. L. 오스틴(J. L. Austin)이 처음 제안한 개념인데요. 오스틴은 “말하기=행하기”라는 멋진 주장을 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일상에서 말로 할 수 있는 행동을 생각해봅시다. 예를 들어 “약속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약속이라는 행위를 실제로 하게 됩니다. 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 사과 행위를 한 것이죠. 심지어 결혼식 주례사에서 “이 둘을 부부로 선포합니다”라고 선언하면, 진짜로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사회적 현실이 변화합니다. 이처럼 어떤 말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말하는 그 순간 하나의 행위를 수행해요. 오스틴은 이런 특별한 발화를 “수행 발화”(퍼포머티브, performative)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반해 단순히 사실을 진술하는 말(예: “하늘이 파랗다”, “나 오늘 아팠어”)은 “서술 발화”(constative)라고 했죠. 물론 현실의 문장은 완전히 수행적이거나 완전히 서술적인 것으로 깔끔히 나뉘지는 않지만, 오스틴의 핵심 포인트는: 말은 경우에 따라 곧 행위이며, 언어도 곧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오스틴은 또 하나의 발화 행위(speech act) 안에 몇 가지 다른 층위의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고 분석했어요. 첫째는 발화 행위 자체, 즉 어떤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하는 행위(발화 그 자체)입니다. 둘째는 일룩션 행위(illocutionary act), 즉 그 말을 통해 의도한 사회적 행위를 가리켜요. 예컨대 “문 좀 닫아주세요”라는 발화를 생각하면, 발화 행위는 그 문장을 말한 것이고, 일룩션 행위는 정중한 요청이라는 행위죠. 셋째는 퍼록션 행위(perlocutionary act)로, 그 말을 들은 청자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효과를 말합니다. “문 좀 닫아주세요”라고 요청했을 때, 상대가 실제로 문을 닫아주는 행동을 했다면 그것이 퍼록션의 결과입니다. 정리하면, (1) 말하기 자체, (2) 말로서 의도한 행위, (3) 말을 통한 효과 이렇게 세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발화의 의미와 기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오스틴의 제자를 자처한 존 설(John Searle)이라는 미국 철학자는 이 발화행위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설(Searle)은 특히 일룩션 행위(화자의 의도적 발화 행위)의 종류를 체계적으로 분류했는데, 이를 흔히 화행 분류라고 합니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일룩션(act)의 유형은 대표적으로 다섯 가지로 나뉩니다:
- 진술 행위 (assertives 또는 representatives) – 사실 진술이나 의견 표명처럼 어떤 사실을 말하는 행위입니다. 예: “오늘 날씨 참 좋네요.”, “내 이름은 철수야.”
- 명령/요청 행위 (directives) – 상대방에게 어떤 행동을 하도록 요구하는 행위예요. 부탁, 명령, 권유, 질문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예: “창문 좀 닫아 줄래?”, “이거 해봐.”
- 약속 행위 (commissives) – 화자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거나 서약하는 행위입니다. 예: “내일 꼭 도와줄게.”,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 감정 표현 행위 (expressives) – 자신의 심정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발화입니다. 감사, 사과, 축하, 애도 등이 해당돼요. 예: “고마워!”, “미안해요…”, “축하합니다.”
- 선언 행위 (declaratives) – 말하는 순간 어떤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내는 행위입니다. 권위있는 사람이 선언함으로써 현실이 변하는 경우죠. 예: 심판의 “아웃!”,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이제 부부입니다”와 같은 선언, 회사에서 “당신을 해고합니다”.
이 분류에 따른 예시들을 보면,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말이 정보 전달뿐만 아니라 어떤 의도를 띤 행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라도 직접적으로 말하느냐, 간접적으로 돌려 말하느냐에 따라 화행이 달라지기도 해요. 예를 들어 “창문 좀 닫아 주세요.”는 겉보기엔 부탁이지만, 상황에 따라 명령으로도 들릴 수 있고, 질문의 형태로 돌려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 “창문 닫는 것 좀 도와주시겠어요?”라고 하면 간접적인 요청이 되죠). 이렇게 직접화행과 간접화행의 차이도 화용론의 흥미로운 연구 주제입니다. 간접화행은 보통 정중함이나 완곡한 표현을 위해 자주 사용되는데, 이는 뒤에서 다룰 공손성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발화행위 이론의 대표적인 관련 학자는 앞서 언급한 오스틴(Austin)과 설(Searle)입니다. 오스틴의 저서 《말행위 수행: How to Do Things with Words》(1962)는 이 분야의 고전이고요, 설은 1969년 《Speech Acts》라는 책을 통해 오스틴의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또한 1975년 논문 〈Indirect Speech Acts〉에서 간접화행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여, “질문을 가장한 요청” 같은 현상을 분석했죠. 이들의 연구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말을 함으로써 행해지는 행동들”을 이해하는 틀을 갖게 되었습니다.
협력의 원리: 대화의 숨은 약속 (Grice의 Cooperative Principle)
일상적인 대화가 성립하려면, 묘하게도 화자와 청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약속이 하나 있습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은연중에 지키는 대화의 기본 원칙 같은 거예요. 이를 “협력의 원리”라고 부릅니다. 1975년, 영국 철학자 H. P. 그라이스(H. P. Grice)가 대화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화자와 청자가 따라야 할 기본 규칙을 제안했는데, 그게 바로 협력의 원리(cooperative principle)입니다. 한마디로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화의 목적에 맞게 협조해서 말하라”는 원칙이에요.
그라이스는 이 협력 원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네 가지 대화 규칙(대화 격률)으로 정리했습니다. 우리 모두 별 생각 없이 지키고 있지만, 막상 이름을 붙여보면 “아, 맞아 대화할 때 저런 것들을 당연히 지키고 있었네!”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원리들이에요:
- 양의 격률 (Quantity) –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 제공하라는 원칙입니다. 너무 적게 말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장황하게 필요 이상의 말을 늘어놔도 안 됩니다. 적절한 양의 정보를 주는 것이죠. 예를 들어 친구가 “어제 영화 어땠어?”라고 물었는데,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엉뚱하게 “그 영화 감독은 참 대단한 사람이야... (중략)...” 하며 이야기가 산으로 가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주는 바람에 정작 궁금했던 질문에 답을 못 얻겠죠. 혹은 반대로 “어제 영화 어땠어?”에 “응.” 한마디로 끝내버리면, 대화가 이어지질 않을 거예요. 이런 것이 양의 원리를 어긴 사례입니다.
- 질의 격률 (Quality) – 진실을 말하라는 원칙입니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말고, 충분한 근거가 있는 말만 하라는 것이죠. 대화에서 서로 팩트에 기반해 이야기해야 신뢰가 쌓이고, 대화도 순조롭습니다. 예를 들어 가고 싶지 않은 약속에 빠지려고 “나 아파서 못 갈 것 같아”라고 거짓말하면 질의 격률을 위반하게 되겠죠. 물론 현실에선 때로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대화 상대가 거짓말한다고 가정하면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이 격률이 중요합니다.
- 관련성의 격률 (Relevance) – 관련 있는 말만 하라는 원칙이에요. 대화의 주제나 목적과 동떨어진 말을 불쑥불쑥 하지 말라는 것이죠. 서로 맥락에 맞게, 주제에 맞게 대화를 이어갈 때 의사소통이 잘 됩니다. 예컨데 친구가 “요즘 나 살 좀 찐 것 같아.”라고 했을 때, 전혀 관련 없이 “내일 우리 영화 볼까?”라고 답하면 대화 흐름이 끊어져 버립니다. 재미있는 예로, 누군가 불편한 주제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관련성 없는 말로 화제를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A: “너 저번 시험 성적 별로였다며?” B: “와, 날씨 진짜 좋다! 산책이나 갈까?” 이런 식이죠. B는 지금 뜬금없이 날씨 얘기를 해서 관련성의 격률을 어겼지만, 사실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셈입니다.
- 태도의 격률 (Manner) – 분명하고 명료하게 말하라는 원칙입니다. 모호한 표현이나 애매한 말투는 피하고, 조리 있고 간결하게 말해야 해요. 또한 말의 순서를 혼동하게 하지 말고,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전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오늘 학교 어땠니?” 물었을 때 “글쎄... 뭐 잘 봤나 못 봤나...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날씨가 좋다가도 안 좋고….” 이런 식으로 횡설수설 답한다면, 태도의 격률에 어긋나는 거죠. 듣는 사람은 답답해지고,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하게 될 겁니다. 결국 명확성, 간결성, 질서정연함이 태도의 원리 핵심이에요.
이 네 가지 원리(양, 질, 관련성, 태도)는 우리가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대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지키는 규범입니다. 그래서 서로 말이 통하고, 대화가 이어지는 거죠. 만약 대화 참여자 중 한 명이라도 이 협력 원칙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대화가 엉망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 “너 왜 울고 있어?”
딸: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머니: “아니, 울 정도면 뭔 일 있는 거잖아. 무슨 일이야?”
딸: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요!”
어머니: “엄마한테 말해 봐, 뭔데 그래?”
딸: “상관하지 말고 그냥 나가 주세요.”
이 대화에서는 딸이 어머니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죠. 질문의 요지와 관련없는 대답(관련성 위반), 필요한 정보의 미제공(양의 격률 위반) 등 협력 원리를 거의 안 지키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화가 원활히 진행되지 못하고 단절되고 말아요. 이런 예시를 보면, 우리가 평소 대화를 나눌 때 얼마나 협력적으로 정보를 주고받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라이스의 협력 원리는 대화의 기본 전제일 뿐 아니라, 격률을 어겼을 때 오히려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다는 통찰로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일부러 이 원칙을 어기는 발화를 하는데, 그 이유는 겉말과 속뜻을 다르게 하려는 의도가 있을 때예요. 방금 예에서 딸은 일부러 관련성 없는 답변으로 대화를 피했고, 그로 인해 “난 그 얘기 하기 싫어”라는 속뜻(함축)을 전달했죠. 이렇게 협력 원리를 부분적으로 어기는 전략으로 미묘한 함축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대화 함축 개념과 연결됩니다.
(참고로, 협력 원리를 처음 제안한 그라이스(Grice)의 논문 〈대화의 논리와 대화적 함축〉(1975)은 현대 화용론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입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협력 원리와 대화 함축의 개념을 상세히 설명했어요.)
대화 함축: 말하지 않은 뜻까지 읽어내기 (Conversational Implicature)
대화 함축(會話 含蓄)이란, 말하는 사람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대화 상대가 맥락과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눈치채게” 되는 숨은 뜻을 말합니다. 흔히 함축적 의미, 암시적인 뜻이라고 하죠. 대화 함축은 협력의 원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념이에요. 왜냐하면 대화 참가자들은 상대가 기본적으로 협력하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발화 이상의 의도를 추론하게 되거든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A: “오늘 회의 어땠어요? 잘 진행됐나요?”
B: “음, 회의실 커피는 맛있더라구요.”
B의 대답을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A는 회의 내용이나 결과를 물었는데, B는 뜬금없이 커피 맛 얘기를 했어요. 겉으로 보면 문맥에 맞지 않는 엉뚱한 대답(관련성의 격률 위반)처럼 보이죠. 하지만 서로 대화 협력을 한다는 전제 아래, A는 B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려고 할 겁니다. ‘회의 얘긴 쏙 빼고 커피 얘기만 하는 걸 보니… 회의가 잘 안 됐나? 별 성과 없었나 보네.’ 하고 추론하게 되죠. 바로 이 추론된 의미가 대화 함축입니다. 즉, B는 회의 결과가 신통치 않았음을 함축적으로 전달한 셈이죠. 직접적으로 “회의 완전 형편없었어요”라고 말하지 않고도, 우회적으로 의미를 전달한 거예요.
이런 함축은 일상 대화에 정말 흔합니다. 특히 상황을 돌려 말하고 싶을 때 많이 쓰죠. 가령 친구 사이에:
친구1: “나 이번 시험 망친 것 같아...”
친구2: “에이, 배고픈데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
친구2는 친구1의 시험 이야기에 대놓고 반응하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어요. 이건 겉보기엔 협력 원리를 어긴 거지만, 친구1은 친구2의 속마음을 압니다. “시험 결과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기운 내자”라는 위로의 함축을 친구2가 전하고 있음을 알아채죠. 오히려 직접 “너 시험 망쳤구나, 안됐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이런 함축적인 반응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예:
엄마: “오늘 친구랑 저녁 먹고 10시에 들어올게요.”
아들: “알았어. 근데 엄마, 거기 새로 생긴 카페 케이크 맛있더라.”
아들이 갑자기 엉뚱하게 카페 이야기를 꺼냈지만, 엄마는 바로 알아차립니다. ‘아, 얘가 카페 케이크 사오란 얘기를 이렇게 돌려 하는구나!’ 하고요. 이렇듯 직설적으로 요구하거나 질문하지 않고도, 우리는 상대가 충분히 눈치챌 거라고 기대하며 힌트를 흘리곤 합니다. 이것도 대화 함축의 한 예지요.
대화 함축 개념을 체계화한 것도 역시 그라이스(Grice)입니다. 그는 “회화적 함축”이라는 개념을 통해, 말의 직시적 의미(말 그대로의 의미)와 의미의도적 의미를 구분해서 보았어요. 함축은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적절한 맥락에서는 청자가 충분히 추론 가능한 의미로 정의됩니다. 함축에는 일반적 함축과 특수적 함축 같은 구분도 있습니다만 (예: 일반적 함축은 특정 맥락 없이도 관용적으로 얻어지는 함축, 특수적 함축은 특정 상황에서만 성립하는 함축), 블로그에서는 너무 깊이 들어가기보다는 전체적인 아이디어에 집중하겠습니다.
중요한 건, 화용론에서 함축은 언어의 풍부한 의미 전달을 가능케 하는 핵심 기제라는 거예요. 말로 모든 걸 100% 다 설명하지 않아도, 듣는 이가 알아서 이해해주는 부분이 있다는 것, 참 멋지지 않나요? 이는 언어 소통에서 상호 간의 지식 공유, 추론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아주 간단한 질문-대답 한 쌍에도 함축이 숨어 있습니다:
“지금 몇 시예요?” – “마트 문 닫을 시간이에요.”
이 대화에서 두 번째 화자는 정확한 시간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지금 아마 10시가 넘었구나”라는 걸 상대는 이해할 수 있어요. 이런 것들이 모두 함축의 세계랍니다.
정리하면, 대화 함축은 협력 원리를 기반으로 청자가 발화의 숨은 뜻을 읽어내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를 능숙하게 주고받는 것이 의사소통 능력(pragmatic competence)의 중요한 부분이지요. 언어를 배울 때 단어와 문법만 외워서는 부족하고, 이런 함축적 의미 파악 능력까지 길러져야 비로소 유창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습니다.
공손성 이론: 예의를 갖춘 언어 전략 (Politeness Theory)
우리는 왜 돌려 말하거나, 굳이 공손한 표현을 써서 말할까요? 바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고, 사회적 조화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화용론에서 공손성(politeness)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인데요. 단순히 “예의있게 말하기”를 넘어서, 사람들이 대화에서 서로의 체면(face)을 세워주기 위해 어떤 전략을 쓰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합니다.
공손성 이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개념이 바로 “페이스(face)”, 우리말로는 흔히 “체면”이라고 번역합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이 제시한 개념인데, 체면이란 사회적 자아에 대한 체취, 즉 타인이 내 자존심이나 사회적 이미지를 존중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후 언어학자들이 이 개념을 받아들여 언어적 공손성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브라운과 레빈슨(Brown & Levinson)의 공손성 이론입니다.
브라운과 레빈슨은 체면을 긍정적 페이스(positive face)와 부정적 페이스(negative face)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긍정적 페이스는 “내가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뜻해요. 쉽게 말해, “나를 좋아해주길, 내 의견에 동의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죠. 부정적 페이스는 “내 행동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으려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즉 “강요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싶다”는 바람이죠. 대화에서 이 두 페이스를 서로 지켜주려는 노력이 바로 공손성 전략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볼게요. 친구에게 돈을 좀 빌려야 한다면, 단도직입적으로 “야, 돈 10만 원 빌려줘.”라고 하기보다는 “미안한데, 내가 요즘 좀 급해서 말이야… 혹시 1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완곡하게 청합니다. 왜 이렇게 돌려 말할까요? 첫째, 상대의 부정적 페이스(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입니다. 부탁이나 명령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미안한데… 혹시 ~해줄 수 있을까”처럼 말함으로써 “네 결정에 따를게”라는 여지를 주는 거죠. 둘째, 긍정적 페이스에 대한 배려도 있습니다. 그냥 “돈 내놔” 식으로 말하면 상대는 “날 무시하나” 기분 나쁠 수 있죠. 대신 공손한 어조로 부탁하면 상대는 “나를 존중해주는군” 느낄 겁니다. 이렇게 화자는 공손한 표현으로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고, 청자는 그런 배려를 고마워하면서 대화가 원만해지는 것이 공손성의 마법입니다.
브라운과 레빈슨은 사람들이 공손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대표적인 전략들도 소개했습니다. 예를 들어 직설적 전략(bald on-record) vs 완곡한 전략(off-record), 적극적 공손(positive politeness) vs 소극적 공손(negative politeness) 등의 구분이 있어요. 적극적 공손은 상대의 긍정적 페이스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상대를 칭찬하거나,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친밀감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와, 이거 정말 잘하셨네요! 혹시 다음에 기회 되시면 이것도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라고 하면, 먼저 칭찬과 친근감을 표현(긍정적 페이스 존중)하고 부탁하니 상대가 기분 좋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지죠. 한편 소극적 공손은 상대의 부정적 페이스를 지켜주는 것으로, 상대에게 부담을 최소화하며 말하는 전략입니다. 예를 들면 “죄송하지만, 혹시 가능하시다면 이 일을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처럼 사과의 말을 먼저 하거나, “괜찮으시다면”,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등의 표현을 붙이는 거죠. 이렇게 하면 상대에게 “억지로 하라는 건 아니에요”라는 메시지를 주어 자유를 존중하게 됩니다.
또 간접적인 암시(off-record) 전략도 있는데, 아예 부탁이나 요구를 직접 말하지 않고 힌트만 주는 방법이에요. 예컨대 “아, 이사해야 하는데 짐이 너무 많다…”라고 푸념하면, 듣는 친구가 눈치가 빠르면 “도와달라는 뜻이구나”라고 알아차리고 도움을 제의할 수 있겠죠. 이는 매우 높은 수준의 공손 전략으로, 상대방에게 최대의 선택 자유를 줍니다(안 들어줘도 되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함축을 잘 알아차려야 통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Geoffrey Leech(제프리 리치)라는 영국 학자는 공손성을 몇 가지 대화 격률의 형태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그라이스가 협력 원리를 격률로 정리했듯이, 리치는 공손성의 원리(Politeness Principle)를 보조 격률들로 풀어서 설명했어요. 리치가 제안한 여섯 가지 공손 격률을 소개하면: 요령의 격률 (상대에게 부담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최대화하라), 관용의 격률 (자신에게 이익을 최소화하고 부담을 감수하라), 칭찬의 격률 (상대를 비방하지 말고 칭찬을 극대화하라), 겸양의 격률 (자신을 칭찬하지 말고 비하를 적절히 하라), 동의의 격률 (상대와의 의견 불일치를 최소화하고 동의를 극대화하라), 동정의 격률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표현하라) 등이 있어요. 예를 들어 요령의 격률에 따라 우리는 부탁할 때 “이거 해”라고 하기보다 “이거 해주시면 제가 정말 감사하겠어요”라고 해서 상대에게 돌아갈 이득(감사받는다든지)을 언급하려 하죠. 그리고 칭찬의 격률 덕분에, 누군가의 단점을 지적하기보단 장점을 말해주는 게 예의라는 걸 압니다. 이런 격률들은 문화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예의 감각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한국어에는 특히 공손 표현이 잘 발달되어 있죠. 존댓말과 반말의 체계, 호칭어와 경어 체계가 매우 정교합니다. 그래서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때 “상황에 맞는 높임말 사용”이 큰 도전이 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내용이라도 “밥 먹었어?” (반말) vs “식사 하셨어요?” (높임말) vs “진지 잡수셨습니까?” (아주 높임말)처럼 다양한 높임 등급이 있죠. 이는 사회적 맥락(상대의 연령, 지위 등)에 따라 선택되며, 한국어 화용론의 중요한 연구 주제입니다. Brown & Levinson의 이론도 한국어에 적용해 보면, 한국어 화자는 상대방의 긍정적 페이스와 부정적 페이스를 모두 고려하여 존대어미(-요, -습니다 등)나 높임칭호(직장 상사에게 부장님, 교수님 등)를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공손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어요. 재미있게도 한국어의 경어법은 서구 언어의 공손 전략과 조금 다르게 동작하기도 합니다. 가령 한국어에서는 상대방을 낮추는 표현(하대)이 실수로 나오면 큰 결례지만,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예: “소인이…”, “저희 집이 보잘것없지만…”) 등은 오히려 상대를 높이는 효과를 내죠.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손성은 Brown & Levinson의 서구 중심 이론에 새로운 시각을 주기도 했어요. 실제로 학계에서는 한국어, 일본어처럼 경어법이 발달한 언어에서는 체면의 개념이 약간 다르게 적용된다거나 공동체 조화(체면뿐 아니라 관계 유지)가 더 중시된다는 등 여러 논의가 있습니다.
공손성 연구의 대표 학자로는 위에 언급한 Penelope Brown & Stephen Levinson(브라운과 레빈슨)이 가장 유명하고요, Geoffrey Leech(리치)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초기에는 Robin Lakoff(로빈 레이코프)라는 학자가 “예의 전략”을 언급하며 “상대방에게 부담 주지 말 것”, “선택권을 줄 것”, “기분 좋게 해줄 것” 같은 규칙을 제시하기도 했죠. 한국 학계에서도 공손성은 인기 있는 연구 주제입니다. 예컨대 한국어 높임법을 Brown & Levinson의 체면 이론으로 분석한 연구들이나, 한국인의 대화에서 예의 표현 (식사 권유할 때 “드세요/먹어” 차이 같은)을 다룬 논문들이 다수 있어요. 한국 문화의 독특한 눈치나 체면 문화도 공손성 연구와 연결되어서, 외국인 학습자를 위한 한국어 공손 표현 교육 방안 연구도 활발하답니다.
담화와 화용론: 말, 그 이상의 단위에서
담화(談話)란 간단히 말해 문장들이 모여 이루는 더 큰 언어 단위, 즉 연속된 발화나 텍스트 전체를 가리킵니다. 화용론은 개별 문장이나 발화뿐만 아니라 이 담화 수준에서도 많은 개념들을 탐구합니다. 실제 대화는 문장 하나로 끝나지 않고, 여러 발화들이 이어져 큰 흐름을 이루니까요. 이 흐름 속에서 화자와 청자는 어떻게 의미를 공동으로 만들어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 화자와 청자의 역할: 대화에는 항상 화자(말하는 이)와 청자(듣는 이)가 존재하고, 보통 수시로 그 역할이 바뀌면서(interchange) 상호작용이 일어납니다. 화용론에서는 화자-청자 간의 상호작용 규칙에 관심이 많아요. 예를 들어 “말 차례(turn-taking)” 규칙이 있죠. 일상 대화를 보면,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상대가 말이 끝났음을 느끼고 나서 내 차례에 말을 합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상대 말이 끝나기 전에 겹쳐 말하지 않는 게 예의이고 또 그렇게 해야 대화가 진행된다는 걸 알고 있어요. 만약 둘 다 동시에 말하려 하면 “어, 먼저 말씀하세요” 하며 양보하기도 하죠. 이렇듯 대화 참여자들은 서로 교대로 말하는 규칙을 따르고, 이러한 규칙을 어기는 경우 (말 끊기, 한 사람이 독점하기 등) 대화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러한 turn-taking 관습도 화용론적 연구의 한 분야입니다.
- 청자의 적극적인 역할: 흔히 대화에서 말하는 사람만 활동적이고, 듣는 사람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청자도 나름의 발화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네”, “맞아요”, “정말요?” 같은 맞장구나 추임새(backchannels)를 넣죠. 한국어에서 “응, 응”, “그래그래”, “어머, 정말?” 같은 청자의 추임새는 상대에게 내가 잘 듣고 있어요라는 신호를 주는 중요한 화용적 장치입니다. 이렇게 청자는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반응을 내보내며 대화의 공동 창작에 기여해요. 이러한 화자-청자의 상호작용 측면을 연구하는 분야가 담화 분석(discourse analysis)이나 대화 분석(conversation analysis)과 겹치는 부분인데, 화용론적으로 볼 때도 발화의 의미는 상대의 반응에 힘입어 완성되는 면이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농담을 했을 때 상대가 웃어주면 그제야 그것이 농담으로서 성공적인 발화가 되는 것이죠. 상대가 무표정하다면 농담이 통하지 않은 것이고요. 이처럼 청자의 역할까지 포함해야 발화의 효과나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 전제(Presupposition): 화용론에서 전제(前提)란 어떤 발화가 성립하기 위해 화자와 청자가 미리 공유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배경 정보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발화 속에 깔려 있지만 직접 언급되지는 않은 숨은 가정이에요. 예를 들어, “철수도 지금 거기에 가고 있어.”라는 말이 있다면, 여기에는 “철수 외에 다른 누군가도 이미 거기에 가고 있다”는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도(also)”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화자는 “이미 다른 사람이 간다”는 정보를 당연한 전제로 깔고 말한 거죠. 또 “정국은 총각이다.”라는 문장을 보면 “정국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정보가 자동으로 전제됩니다. ‘총각’이라는 단어 자체에 “미혼 남성”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죠. 재미있는 사실은, 전제는 그 문장을 부정하거나 질문으로 바꿔도 여전히 살아남는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정국은 총각이다”의 전제는 “정국은 총각이 아니다” (부정문)라고 해도, 또는 “정국은 총각인가?” (의문문)이라고 해도 그대로 전제됩니다. 청자는 여전히 “정국이 미혼인 상태”를 당연한 정보로 받아들이죠. 이런 특성 때문에 전제는 함축과는 다른 유형의 숨은 의미로 구분됩니다. 함축은 맥락 따라 취소될 수도 있지만(명시적으로 말하면 풀리는), 전제는 발화 속에 내재된 조건처럼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전제의 예는 일상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어요. “다시 한 번 말해줘”라는 요청에는 “이미 한 번 말한 적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고, “철수가 이번에는 합격했더라”라는 말에는 “철수가 예전에 불합격한 적 있다”는 전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또 “민지는 후회하고 있어”라는 문장은 “민지가 뭔가 잘못하거나 안 좋은 선택을 했다”는 전제를 전달하지요. 화용론 연구자들은 이러한 전제가 어떻게 발생하고, 대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연구합니다. 전제는 대화 참여자들 간의 ‘공통 배경 지식(common ground)’을 형성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어요. 서로 이런 전제를 많이 공유할수록 대화는 압축적으로 진행될 수 있고, 전제가 어긋나면 대화에 혼선이 생깁니다. 가령, 상대는 모르는 사실을 내가 전제하고 말을 꺼냈을 때 (“어제 다시 만났잖아.” 라고 말하면 상대는 “?? 우리 어제 만났나?” 할 수 있죠), 전제 깨짐으로 인해 “어, 너 그거 몰랐어?” 같은 대화 수선(repair)이 필요해집니다.
- 담화 표지(discourse markers): 우리말에 “음…”, “그러니까”, “근데”, “솔직히”, “뭐랄까” 같은 자잘한 말들이 있죠. 겉으로 보면 대단한 내용이 없는 말인데, 대화에서 자주 쓰입니다. 이런 걸 담화 표지(또는 화용 표지)라고 부릅니다. 담화 표지는 화자의 태도나 담화 전개의 구조를 보여주는 단서 역할을 해요. 예를 들어 “솔직히”라고 말을 시작하면, 이제부터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겠다는 화용 신호를 준 셈입니다. “근데”로 시작하면 화제를 전환하거나 새로운 주제로 넘어감을 알리는 거죠. “음…”이나 “저기…”는 말을 바로 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하는 중이라는 걸 표시하기도 하고, 또는 대화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한 완충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영어로 치면 “well…”, “so…”, “you know,” 이런 표현들과 비슷해요. 이런 담화 표지는 정보 전달에는 큰 기여를 안 하지만, 대화의 자연스러움과 청자의 이해를 도와주는 윤활유입니다. 화용론과 담화 분석 분야에서는 이러한 표지어들을 많이 연구합니다. 한국어에도 “막”, “그냥” 같은 말이 쓰임새에 따라 다양한 화용적 의미를 나타내는데, 이런 것도 연구 주제이지요.
이 외에도 담화 차원에서 흥미로운 화용론적 개념들이 많아요. 대화의 구조(예: 인사 - 본론 - 작별의 순서 등), 이야기 담화에서 화자의 서사 전략, 청자 반응 유형 등등이 있죠. 예를 하나 들자면, 전화 통화를 할 때 한국인은 보통 “여보세요”로 시작하지만 전화를 끊을 때는 잘 안 씁니다. 대신 “네, 들어가세요.”, “내일 뵐게요.” 등 상황에 맞는 끝인사를 하죠. 이러한 시작과 종료의 담화 패턴도 문화마다 달라 연구 대상이 됩니다.
화용론적 시각에서 보면, 언어는 단순히 문법과 사전적 의미의 조합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역동적인 의미 협상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맥락, 화자-청자 관계, 전제, 함축, 공손성 등 여러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가 하는 담화를 형성하지요. 그래서 화용론은 종종 사회언어학(sociolinguistics)이나 담화 분석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일례로, 어떤 말투는 권력 관계를 드러내기도 하고 (반말로 누군가를 대하면 우위에 있음을 나타내는 등), 어떤 어휘 선택은 젠더(성별) 정체성이나 집단 정체성과 연결되기도 해요. 이렇듯 화용론은 언어와 사회/문화의 접점을 탐구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위 그림은 언어 의사소통의 6가지 요소를 도식화한 그림입니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발신자(Sender)와 수신자(Receiver)가 대화의 화자와 청자에 해당하고, 가운데 메시지(Message)가 전달 내용이에요. 그리고 1번으로 표시된 맥락(Context), 5번 채널(Contact), 6번 코드(Code)가 있습니다. 코드는 사용되는 언어 자체(예: 한국어, 영어 등)를 말하고, 채널은 의사소통 경로(직접 대면, 전화, 문자 메시지 등)를 의미합니다. 이 모식도를 제안한 언어학자 Roman Jakobson(야콥슨)은 발신자-수신자-메시지-맥락-코드-채널이라는 요소 각각에 해당하는 언어 기능이 있다고 설명했어요. 예컨대 맥락 요소에 대응하는 기능이 지시적 기능(참조적 기능)이고, 발신자에 대응하는 건 정서적 기능 (화자의 감정 표현), 수신자에 대응하는 건 명령적 기능 (청자에게 영향을 주는 말, 예: 명령이나 권유), 채널에 대응하는 건 친교적 기능 (대화의 채널을 열어두는 잡담, 인사말 등), 코드에 대응하는 건 메타언어적 기능 (언어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 등이죠. 이렇듯 대화를 이루는 요소와 기능을 종합적으로 보면, 담화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관계 형성, 사회적 행위, 표현과 설득 등 다양한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각 측면을 연구하는 것이 화용론의 영역입니다.
한국어 화용론 연구: 우리의 언어, 우리의 맥락
지금까지 화용론의 주요 개념들을 살펴봤는데요, 한국어에서는 이러한 개념들이 어떻게 연구되고 있을까요? 화용론은 서구에서 발달한 학문이지만, 한국어의 독특한 특성에 맞추어 국내 연구자들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본격적으로 화용론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경부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 전통 언어학은 주로 문법과 의미에 집중했지만, 80년대 이후 “맥락 속 언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화용론 개념이 도입되었어요. 서울대학교와 같은 곳에서 이정민 교수(Chungmin Lee)나 남승호 교수 등 의미론/화용론 전공 학자들이 선구적 연구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정민 교수는 한국어의 초점(focus)과 담화 의미, 전제 등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고, 국제 화용학회(IPrA)에서도 활동하셨죠. 또한 남승호 교수는 한국어의 의미와 화용 전반을 다루는 저서를 집필하고, 대학에서 화용론을 가르치며 많은 제자를 양성했습니다.
국내에는 한국화용론학회와 담화인지학회 같은 학술 단체도 있어서, 학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한국어의 화용적 현상을 연구 발표합니다. 이러한 모임에서 다루는 주제들을 보면, 한국어의 특색을 살린 흥미로운 연구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 한국어 높임말과 공손 전략: 한국어 경어법(높임말 체계)은 외국 학자들에게도 관심거리입니다. 국내 연구자들은 Brown & Levinson의 체면 이론이 한국어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또 어느 부분에서 수정이 필요한지 연구해왔어요. 예를 들어 상대방을 칭호로 부르는 문화(식당 아주머니를 “이모”라 부르며 친근감을 표현하는 것)도 공손 전략의 하나로 분석됩니다. 또한 말 끝의 어미 선택(-요 vs -ㅂ니다 vs 반말)이 공손성에 미치는 영향과, 대화 상대와의 거리감 표현을 여러 층위로 조사한 연구들도 있습니다.
- 한국어 화행 연구: 사과, 요청, 거절, 약속 등 다양한 발화행위가 한국어 담화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미안합니다”와 “죄송합니다”의 뉘앙스 차이나, 사과할 때 어떤 추가 설명이나 변명을 덧붙이는 경향 등이 조사된 바 있어요. 또 “밥 한번 먹자”와 같은 제안/초대 화행이 실제로는 그냥 예의상 하는 인사치레인지, 진짜 약속 의도인지 분석한 연구도 있고요. 거절 표현의 경우 한국어 화자는 직접 “안 된다” 하기보다는 돌려 말하거나, 여러 번 사양 끝에 겨우 거절하는 경향이 있다는 등의 결과도 있습니다. 이런 건 문화 간 화용론(cross-cultural pragmatics) 연구로도 이어져서, 한국인 vs 영어권 화자의 화행 실현 방식 비교 연구들도 활발합니다.
- 대화에서의 듣기 행동: 아까 이야기한 맞장구, 추임새 같은 청자의 행동도 한국어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어요. 특히 황옥경 교수 등의 연구를 보면, 한국어 대화에서 청자가 “네네”, “그렇죠”, “어머!” 등으로 적극적으로 반응해주는 것이 대인관계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대화를 활성화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일본어와 비교하면 한국어 화자가 더 빈번하게 추임새를 넣는 편이라든지, 세대 차이에 따라 추임새 표현이 달라진다든지 하는 흥미로운 결과들도 있죠.
- 담화 표지와 감탄사 연구: 한국어의 “막”, “그냥”, “어…”, “있잖아” 같은 담화 표지들에 대한 분석도 있습니다. 이러한 말들이 문법적으로는 필요없어 보여도, 실제 대화에서는 발화 완충, 생각 정리, 공감 유도 등 중요한 기능을 함을 보여주는 거예요. 예를 들어 “있잖아,”로 시작하면 상대방의 주의를 끌고 새로운 주제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고, “막”은 설명을 부드럽게 이어주거나 심리적 거리를 좁혀주는 효과가 있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작은 말들의 쓰임새 하나까지 캐치해내는 것이 화용론 연구자들의 안목이지요.
- 맥락과 의미의 변화: 한국어 특정 표현이 특정 맥락에서 독특한 의미를 띠는 현상들도 연구됩니다. 예컨대, 직장 동료끼리 아침에 만나면 “식사하셨어요?” 혹은 “밥 먹었어?” 하고 인사처럼 묻는 문화가 있습니다. 이건 진짜로 밥을 먹었는지 궁금해서라기보다 “안부 인사”의 역할을 하지요. 외국인들은 처음에 이걸 이해 못 해서 “왜 자꾸 내 식사 여부를 궁금해하지?” 싶지만, 맥락을 알면 아, 이게 그냥 “안녕하세요” 같은 인사말이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관용적 맥락에서 의미 변화된 표현도 화용론 관심사입니다. 한국어의 “네”라는 대답도, 경우에 따라 상대방 말에 대한 확인이 아닌 “듣고 있다”는 표시로 쓰이는 등 맥락에 따른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지기도 하고요.
- 매체에 따른 화용: 현대에는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나 SNS 대화도 많잖아요. 최근 한국어 화용론 연구에서는 전자 매체에서의 대화 예절이나 이모티콘, 줄임말의 화용적 기능도 탐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메신저에서 마침표(.) 하나를 찍느냐 마느냐에 따라 느낌이 딱딱해지거나 부드러워지는 경험 해보셨을 거예요. “네.” 와 “네”의 차이처럼요. 이런 것도 일종의 공손 전략이고 함축이 작용하는 부분이라서, 연구자들이 설문 조사도 하고 대화 데이터를 분석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모지(이모티콘) 사용이 글로 전달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뉘앙스를 보완하는 화용적 역할을 한다는 연구도 있어요. 예컨대 같은 “ㅎㅎ”라도 맥락 따라 친근함 표시가 되기도 하고, 빈정거림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이런 디지털 시대의 맥락 읽기를 화용론이 다루게 되는 거죠.
이처럼 한국어 화용론 연구는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내 대표 연구자들로 앞서 언급한 이정민, 남승호 교수 외에도, 신지영 교수(한국어의 성별 언어와 화용 연구로 유명), 김양현 교수(한국어 교육 분야에서 화용론 적용 연구), 최희영 교수(한국어 정중법 연구) 등 많은 학자가 있습니다. 또한 국립국어원 등에서도 국어의 화용적 특징을 다룬 보고서나 연구를 수행해왔습니다. 특히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교재 개발에 화용론적 내용이 강조되고 있어요.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수업에서, 단순 문법 문장뿐 아니라 상황별 알맞은 표현, 맥락에 따른 어투 조절 등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니까요. 예컨대, 한국어 교재에 “길 좀 여쭤봐도 될까요?” 같은 정중한 질문 표현이나, “괜찮으시면 제 프로젝터 좀 써도 될까요?” 같은 청유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는 한국어 화용론 연구 성과가 실생활에 응용된 것이죠.